힘들지만, 재밌는 어떤 것

2024년 말의 나는 그냥… 좀 많이 엉망이었다. 일은 계속 있었고, 겉보기엔 문제없어 보였을 수 있지만, 속에서는 공허함이 차올랐다. 매일 그저 버티는 하루와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갔고, 재미도, 여유도, 방향도 없었다. 힘든 건 어느 정도 익숙했지만, 그 힘듦이 아무 의미가 없이 반복되는 것(같은 느낌)에 심각함을 느꼈다. 뭔가 해야 했다.

그러다 문득 AC2가 떠올랐다. 전 회사에서 누군가 정말 배운 것이 많았다고 했던 그 이름. 최근 회사에서 함께 자라기 책을 읽고 떠올렸던 그 이름. 진지하게 고민하지도, 오래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냥 "이거 하면 그지같은 내 삶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바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어떻게든 내 삶이 바뀌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AC2 49기

그러나 첫 공식 일정이었던 OT부터 머리가 하얘졌다. 내가 뭘 하려는지도 모르겠고, 말도 잘 안 나오고, 내가 왜 여기 앉아 있는 건가 싶었다. 그 스트레스의 절정이었던 1차 워크샵 때는 도중에 집에 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불편했고, 도망치고 싶은 감정이 확 올라왔다. AC2 안에서 난 나의 부족한 점을 너무 많이 마주했고, 자신에게 실망해 가며 우울의 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AC2가 뭔가 다 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기대가 무너지는 건 매우 빨랐고, 나는 꽤 아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부터 뭔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힘든 감정이 올라오면 그냥 외면하거나, 딴짓하면서 덮어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저널을 쓰기 시작했다. 그 감정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왜 이렇게 힘든지, 어설프게라도 자꾸 적었다. "AC2 완주하기" 라는 타이틀로.

49기 동안 26개의 저널을 작성했다. 그런데 총 92개의 메세지라니 새삼 사람들에게 감사해진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 문장을 썼다.

소프트웨어 개발 진영에는 "은탄환은 없다." 라는 말이 있는데, 내 삶의 은탄환으로 AC2를 쓰려고 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아 보인다.

그걸 적고 나니 좀 웃겼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AC2를 어떻게든 날 바꿔주는 곳이 아니라, 나에게 이득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이것저것 실험할 수 있는 실험실 같은 곳이라고 보기 시작했다.

중간 회고쯤 되자, 내가 AC2에서 이것만큼은 하고 싶다는 것을 뽑아봤다.

  • 1:1 코칭에서 내 삶에서 정말 중요한 문제 이야기해 보기. 그리고 해결하기.
  • 지식을 다 흡수하려고 애쓰지 말고, 사람들과 연결 맺기
  • 커뮤니티에서 받은 만큼 나도 뭔가 작게라도 돌려주기

이걸 꼭 지키겠다고 다짐하진 않았다. 대신 코칭 세션을 신청했고, 저널을 계속 썼고,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배운 걸 조금씩 나눴다. 과하지 않게,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게. 그 중간 어디쯤이 나한테 잘 맞았다. 어떻게 하면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작은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그걸 아주 조심스럽게 실험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센터가 잡히는 느낌이 있었다. 여전히 정신없고 힘들었지만, 예전처럼 휩쓸리기만 하진 않았다. 불안도 있었고, '나 지금 잘하고 있나?' 싶은 생각도 계속 들었지만, 예전처럼 그 생각에 끌려가기보다는, 그냥 옆에 두고 같이 나아갈 수 있었다. 그게 이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점이었다.


AC2에서 EoA, CTA 같은 뭔가 명시적인 기술(?) 같은 것도 배웠지만, 그것보다 더 기억에 남는 것은 멀쩡하게 살기 위해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것들이었다.

  • 나한테 유리한 방향과 유리한 판을 설계하는 것
  • 의도를 잃지 않으려는 태도
  •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덜어냄에서 비롯된 여유

지금 돌이켜보니 AC2 49기는 힘들었고 재밌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언젠가 한국에 돌아가면 힘들지만 재밌고, 재밌지만 힘든 어떤 것을 하겠다고 다짐한 날이 있었다. 사실 중간에 AC2와 순례길에서의 경험이 비슷하다는 저널을 쓰기도 했는데, 마지막 감상까지 비슷해졌다. 순례길이 내 인생에서 강렬한 경험이었듯, AC2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조금 다른 점은 산티아고 순례길은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완주를 했고, AC2는 49기만 완주를 했다는 것이다. 저널의 타이틀인 "AC2 완주"는 아직이다. 뭘 더 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고,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안에서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봐야겠다.


조금 아쉬운 것은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지 못한 것 같다. 물론 49기 동안 운이 좋게도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하지만 지금 이후로 어떤 계기가 없다면 다시 섞여서 살아볼 수 있을까? 계기가 있어도 내가 그곳으로 잘 뛰어들까? 중간 회고에도, 최종 회고에도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세웠지만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는 내 기질은 아직 여전한가보다. 더군다나 49기가 끝나자마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이 몰아쳐서 요즘은 AC2라는 세계에서 완전히 멀어진 느낌이라 이 아쉬움은 당분간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이곳에서 더 많은 인연을 만들어 보고 싶다.

꾸준히 생각해 보자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